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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상반기 국내답사#2_망우리 역사 문화공원 / 하보예 회원
  • 작성일 : 2022-05-20
  • 조회 : 749

락이망우(樂而忘憂)

 

답사하기 딱 좋은날, 여성건축가협회 회원들이 20222차 답사를 하기 위해 서울 중랑구 망우리 역사 문화공원에 모였다. 주요 답사 일정은 설계자이신 경희대학교 정재헌 교수님의 중랑망우공간(웰컴센터)’ 설명, 그리고 망우공원 스토리텔링 작가 김영식님과 망우리 역사 문화공원산책이다.

  망우(忘憂)는 태조 이성계가 건원릉을 정하고 이곳을 지나면서 이제야 근심을 잊겠다.’고 경탄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후기에는 한양 인근에 망우리보다 아름다운 곳이 없으며, 산은 밝고 물은 빼어나 주변 산세와 물의 기운이 맑고 웅장하다고 망우둥지등에 나와 있다. 또한 망우리 고개는 왕릉을 행차하거나 국장을 치를 때 경기도 동북지역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193398일 인근 공동묘지가 만원을 이루자 망우리에 공동묘지가 신설되었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1973325일 도시개발에 따라 47,700여기의 묘를 끝으로 만장이 될 때까지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기, 산업화시기까지 수많은 망자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2013년에 근현대사를 품고 있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 

1977년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망우 묘지공원으로, 1998년 망우리 공원으로 불리다가 202010월 망우리 역사 문화공원으로 명명되었다. 2015년 공사를 시작으로 2021년 묘지 전수를 통해 100명의 묘를 찾았다. 이곳에는 독립지사, 친일파, 인민군 등 다양한 사람들의 묘가 있다. 건축계의 거장 박수근 선생님의 묘는 이장되어 차후 이 곳에 기념비를 만들 예정이다.

 

중랑망우공간 - 기존 관성을 버리자

중랑망우공간은 202241일에 개관하였으며. 2019년에 설계공모로 당선작이 결정되었다. 건축면적 935.52, 연면적 1,247.252층 건물이다. 1층은 미디어 홈, 2층은 교육전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량망우공간(웰컴센터)을 설계하신 경희대학교 정재헌 교수님께서는 일 년에 작품 하나씩 지금까지 약 40개 정도 설계 작업을 하셨다. 처음 설계 의뢰가 주택이어서 그런지 절반 이상이 주택설계이다. 주택 외의 다른 설계를 하고 싶었던 차에 중량망우공간을 설계할 기회를 접하셨고, 기본 계획을 잡기 위해 현장에 5번을 다녀가셨다. 겉에서 대지를 바라볼 때는 커 보이지만, 실제로 대지는 작았고, 능선과 건물·주차 배치가 해결되지 않아 기본 계획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셨다. 고 한용운 선생 묘에 가서 큰 절 2번하고 정말 안 되네요.”라고 하소연을 하셨는데 그 후부터 고민하던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설계자 정재헌과 회랑이미지>

관성적으로 주차가 앞서고 그 뒤로 건물을 배치하는데 관성을 버리고 건물을 전면 배치하고 주차를 놓으니, 능선 따라 건물이 참하게 앉았다. 두 번째 고민은 사람, 건축, 자연의 경계를 없애고, 외부를 건물 안으로 들이는 것이었다. 그 해답을 선조들의 에서 찾으셨다. ‘는 비어있지만 비어있지 않은 공간이다. 그러한 공간을 통해 사람, 건축, 자연이 경계 없이 조화를 이룬다. 강의를 듣고 있는 공간은 같은 공간이다. 비어있는 공간이지만, 우리들로 인해 공간은 채워지고, 외부였던 공간이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회랑도 경계를 없애는 역할을 한다. 망우공간 초입에 250의 정사각기둥이 쭉 나열되어 있다. 회랑은 고요해야 할 장소임을 인식시켜 주지만 들어가고 나감이 자연스럽다. 마치 이승과 저승, 현재와 미래, 자연과 인공의 경계선을 없앤다.

기도하는 마음, 죽은 자와 산자의 행복을 같이 빌어주는 듯한 공간이 있다. 천정을 쳐다보면 이렁이는 물그림자가 있다. 물그림자의 끝에는 대접에 물이 담겨 있듯, 정화수 같은 물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차분하게 나를 정지시켜 주며, 그 자리에 맴돌게 한다. 정재헌 교수님께서 물의 의미는 부모님들이 소원을 비는 정화수,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나르시즘, 터닝포인트에서의 방향성 등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망우리 역사 문화공원 명당

 조선시대에 망우리에는 봉화가 있었던 장소로, 봉화는 남산까지 연결되었다. 봉화가 있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임을 의미한다. 1933년 공동묘지가 생기면서 망우리는 음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60-70년대에 힘든 서민들은 차라리 죽으러 망우리가요.” 라고 삶의 고통을 망우리에 화풀이했다. 지역민들은 오랜 공동묘지 이미지인 망우리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지금은 묘를 통해 근현대사의 역사이야기를 발굴하게 되었고, 이들의 이야기를 기릴 장소까지 마련되면서 누구나 찾고 싶은 명소가 되었다. 숲 또한 울창해 누군가의 묘를 찾기 위해서는 나뭇잎이 많이 떨어진 겨울이 좋다.

 

최고의 인문학공원 마음이 가야한다

40여명의 유명인사들의 시와 비석이 있는 사진장식가벽과 이름이 있거나 없는 여러 묘를 지나 도착한 곳은 유관순 열사의 묘이다. 묘지 앞 기념비 앞면에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묘라고 되어 있고, 뒷면은 소화 111936년 경성부 작성이라고 되어 있다. 유관순 열사는 18살 에 일제의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공동묘지를 군용지로 사용하기 위해 강제로 묘들을 망우리로 이장했다. 그러던 중 유관순 열사 묘는 없어지게 되었고(유관순 열사 가족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사망했다.) 아마도 이곳에 합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하어 매년 928일 망우리 공원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우리들은 김영식 작가님의 진행에 따라 묵념 후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유관순 열사 묘에서 좀 더 아래로 내려가면 만40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신 이중섭 선생님 묘에 이른다. 아주 양지바른 곳에 묘가 있어 명당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묘 앞의 나무들을 베고, 관리하여 빛이 잘 들어오는 명당을 만들었다. 묘 옆에는 이중섭 선생님 친구들이 심어준 소나무가 멋있게 자라고 있다. 잔디가 잘 자랄 수 있게 소나무 관리를 주기적으로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개정된 법에 따라 국가에서 묘를 관리한다. 묘비에는 하늘에서도 그리울 두 아들의 모습과 작은 화병이 조각되어 있다. 여성건축가협회원들이 묘비를 깨끗이 닦고, 시들은 꽃 대신 새 꽃을 화병에 꽂았다. 김영식 작가님은 화병의 꽃이 마를 날이 없도록 선배 예술인에게 마음을 다하는 문화 선진인이 되기를 우리들에게 당부하셨다.

답사의 마지막 도착지인 박인환 선생님의 묘에 도착하였다. 묘지 앞에 있는 스피크를 통해 고 박인환 선생님의 시 목마와 숙녀의 노래가 가수 박인희의 목소리로 흘려 나온다. ‘목마와 숙녀는 전쟁의 참상, 인간 등의 진리, 절망극복의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박인환 선생님은 사회적 활동을 많이 하셨지만 작가 특유의 섬세함이 인생의 극한적 모습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된 날들을 지새우다 30세에 생을 마감하셨다. 세월이 흘러 작가의 이름은 비록 잊혀지지만 작가의 시는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박인환 선생님 묘비, 스피커와 작은 무대>

 


답사 내내 밟고 있는 땅에서도, 스쳐가는 풀잎에도 조심스러워하고 겸손해했다. 아마도 삶을 마무리 - 치열하게 또는 억울하게, 행복하게, - 했던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불편함이 아니라 앞서 살아내신 분들에 대한 존경심이다. 아주 오랜만에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다.

오롯이 먼저 가신 분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건축물을 설계하시고, 망우리 역사 공원 이야기를 해주신 정재헌 교수님과 김영신 작가님, 이러한 기회를 만들어 주신 여성건축가협회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답사가 끝났지만, 중랑망우공간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있는 몇 몇 분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필자소개> 하보예(비에스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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