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건축가협회 2004년 2차 국내건축답사 작성자:윤재옥(호서대학교) 2004/9/18 박선주(국립민속박물관)
창 덕 궁(비원)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주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쓰게된 뒤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70년 동안 역대 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관람순서: 돈화문-금천교-인정문,인정전-선정전-희정당-대조전-부용지,부용정-영화당-주합루-불로문-기호헌,의두각-애련지,애련정-관람정-존덕정,폄우사-옥류천-연경당,선향제-내의원(성정각)-낙선제-어차고-금호문 ◤① 돈화문 (보물 제383호) | 원래는 화강석조의 하얀색 댓돌이 있었고 그 위에 이층으로 세운 중문이었다. 이런 양식은 옛날 삼국시대로부터 궁궐의 정문으로 채택되어 왔다. 창덕궁과 더불어 돈화문도 임진왜란 때 불에 탔던 것을 선조 40년(1607)에 복구한 것이다. 다포식(외2출목, 내3출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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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 | 다리의 구조는 기반석 위로 홍예 2틀을 만들고 멍엣돌 위에 돌난간을 세우고 다리 윗부분은 장대석으로 깔았다. 중앙부의 홍예 기반석 남쪽 면에는 해태상을, 북쪽에는 거북상을 설치하였다. 이들 상 뒤로 홍예틀이 만나는 기석에 귀면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 |
| 다리 위 양쪽에는 돌로 난간을 돌렸는데, 주석이 서고 그 사이에 동자석이 설치되고 한판 돌로 만든 풍혈이 끼어 있다. 이 다리는 중앙이 들린 구릉형이다. 조선왕궁은 북(玄武)에서 발원하여 외당을 회유하면 극히 길하다는 명당수가 있고 궁의 정문에서 궁전으로 들어가려면 이 명당수 위에 놓인 다리를 통과하여야 한다. 경복궁의 영제교, 창경궁의 옥천교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금천교는 길이가 12.9미터, 폭이 12.5미터로, 태종 11년(1411)에 조성되었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석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진선문 | 창덕궁에는 궁 정문에서부터 정전에 이르는 주출입선에 세 개의 문이 세워져 있다. 세 개의 문은 돈화문, 진선문, 인정문인데, 돈화문은 제일 바깥에 위치한 창덕궁의 정문이고, 다음 금천교를 건너 만나게 되는 진선문은 외행각 주출입문이며, 마지막 인정문은 내행각 주출입문이다. | |
| 진선문은 창덕궁 주입선상에 위치한 중문이므로 문의 전후로는 어도를 두었다. 진선문은 남북축의 돈화문이나 인정문과는 달리 동서축으로 세워져 있다. |
◤② 인정전 (국보 제225호) | 창덕궁은 이궁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지형에 따라 적절히 배치되어있다. 건물은 이중의 월대 위에 중층으로 세워진 정면5간 측면4간 팔작지붕 집으로, 들어가 보면 아래 위층이 트여있다. 다포계(외3출목, 내4출목) 공포양식으로 조선 후기양식이며, 북측 중앙에 닫집으로 장엄된 용상(어좌)이 있다. |
◤③ 선정전 (보물 제814호) | 임금이 신료들과 만나 정사를 의논하는 곳인 편전으로 인조26년(1648) 중건되었고, 정면3간 측면간칸 단층 팔작지붕으로 다포계(외3출목, 내4출목) 공포양식이다. 건물 중앙에 임금이 일월오악병(日月五嶽屛)을 배경으로 앉고, 대소신료들이 위계에 따라 동쪽엔 문관이, 서쪽엔 무관들이 자리 잡는다. | |
| 그리고 한쪽에 사관이 앉아 문답하는 내용을 속기하여 사초(史草)로 삼는다. 외벌의 댓돌을 넓게 설치한 것과 지붕에 푸른색 유약을 입힌 청기와를 이은 점이 특색이다. |
◤④ 희정당 (보물 제815호) | 대조전 남쪽에 있으며, 임금의 거처, 평시 임금이 정사를 보던 곳으로 정면9간 측면3간 단층 팔작지붕 이익공집이다. 중앙의 정면3간 측면3간을 통간(通間)으로 하여 응접실로 사용하였고, 응접실의 서편은 같은 크기로 하여 회의실로 사용하였다. 응접실의 동쪽벽 상부에는 <총석정절경도>, 서쪽에는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걸려있다. 고종은 경복궁이 완성되기까지 머물렀고, 순종이 승하할 때 끝까지 여기에 있었다. 대한제국은 옛 부터의 관습과 개화에 따른 신식문물을 절충시키는 시국에 처했을 때라, 임금의 처소도 전각은 옛법에 따르고 내부는 서양식으로 하였다. 지금의 전각은 1917년 화재를 입어 소실되었던 것을 1920년에 경복궁 강녕전을 헐어다 중건한 것이다. |
◤⑤ 대조전 (보물 제816호) | 침전 여섯 중에 으뜸은 왕비의 침소인 곤전이다. 곤전은 임금의 정침 바로 뒤에 위치하여 중심이 되는 자리를 차지한다. 경복궁의 임금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희정당을 지을 때 왕비의 침전이던 교태전도 함께 옮겨다 대조전을 지었는데, 고스란히 옮긴 것이 아니라 창덕궁에 적합하도록 그 구조는 새롭게 하였다. 월대의 정면과 좌우에 돌층계가 설치되어 보도에 이어졌고, 월대 좌우 귀퉁이에는 청동 드므를 설치하 | |
| 였다. 이는 거기에 물을 담아두면 공중에서 내려다본 화마가 제 모습이 물에 비친 데 놀라 화기를 거두어 도망쳐 버린다는 데서 유래된 장치이다. 이곳은 성종·인조·효종·현종·철종·순종 등이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
◤⑥ 부용지 | 부용지는 장방형 연못으로 가운데에는 직경 9미터의 원형 섬이 조성되어 있다. 원래 이곳에는 숙종 때부터 연못이 있었으며, 1707년 지금의 부용정 터에 택수제가 건립되었던 것을 1792년에 정조가 택수제를 헐고 부용정을 개건한 것이다. 부용정 옆에는 석분위에 아름다운 괴석(怪石)이 심어져 선산을 상징하고 있다. 부용지에는 수련(睡蓮)이 심어져 있고 북쪽의 주합루와 동쪽의 영화당, 남쪽의 부용정이 수면에 오색아롱진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수놓인다. 부용지의 수원(水源)은 지하에서 솟아오르며, 비가 올 때는 서쪽 계곡의 물이 용두의 입을 통하여 입수하게 되어 있다. 못 속에는 잉어나 붕어 등의 물고기를 길러 임금이 낚시나 뱃놀이를 했던 곳이다. 동남쪽 호안(護岸)에는 이채롭게 물고기 한 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
◤부용정 | 영화당에서 과거를 보고 급제를 하면 주합루에 올라가 왕실도서관의 수만 권의 서책을 읽으면서 능력을 함양하게 된다. 그때 그 일을 축수해 주는 자리가 부용정이다. 부용정의 평면은 亞자형이면서 변화를 주어서, 작은 건물이지만 그 구성이 복잡해 보인다. 한쪽의 두 다리를 연못 속에 담그고 섰다. 연꽃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한송이 꽃과 같은 정자로 꾸민 것이다. 정조 때 개건했고, 특이 | |
| 한 구조의 정자이다. 동쪽에 열린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불발기창이 달린 창과 외짝의 문이 있다. 그 안에 들어서면 단문이다. |
◤영화당 | 조선왕조에선 옛 제도에 따라 국가의 동량(棟梁)을 뽑는 일을 과거제도에 의존하였다. 공개시험으로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는 방법이었다. 지방에서 초시에 합격한 사람들만 골라 임금이 친히 참석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게 하였다. 이를 전시(殿試)라 하는데, 영화당은 그런 과거를 보는 장소였다. 원래 이곳은 임금이 신하들과 꽃구경을 하고 시를 지으며 놀던 곳이다. 정조 때부터 이곳을 과거장으로 사용하여, 영화당에는 시관이, 그 앞 춘당대에는 응시자들이 자리잡고 과거를 보았다. |
◤주합루 | 정조가 즉위하던 해에 주합루가 완성된다. 실학의 분위기가 팽배하던 때 정조는 등극하여 유능한 문신들과 더불어 문치에 노력한다. 주합루를 짓고 아래층을 규장각이라하여 수만 권의 책을 보존하는 서고로 꾸몄다. 여기에서 나라에 진출할 동량들을 육성시켰다. 또한 주합루 주변을 아름답게 가꾸어서 영화당에서 취재된 인재들 양성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 |
| 주합루 남쪽에 어수문을 짓고 그 앞에 방지(부용지)를 팠다. 방지의 중앙엔 당주(當洲)를 만들고 잘 생긴 소나무를 심었다. 연못에 당주가 있어야 재록(財祿)을 누린다는 설에 따른 것이다. 방지의 서편엔 누각이 있고 지변(池邊)에 입수하는 물을 토하는 이무기 머리상이 있다. 동쪽엔 영화당이, 남쪽엔 부용정이 있다. |
◤⑨ 옥류천 | 이곳은 창덕궁 후원 속에서 가장 깊은 계원(溪苑)이다. 1636년 인조가 이 계원을 조성했다. 계류는 북악산의 동편 줄기의 하나인 응봉(鷹峯)의 산록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산내와 어정(御井)을 파서 천수(泉水)를 흐르게 하였다. 계류가에는 청의정·소요정·태극정·농산정·취한정을 적절히 배치하고 판석 등으로 간결 | |
| 한 석교를 놓고 어정 옆의 자연 암석인 소요암을 ㄴ형을 파서 곡수구와 폭포를 만들고 암벽에 시문을 새기기도 했다. 이 소요암에 곡수구를 파고 폭포를 만든 것은 1636년 인조 때이다. '옥류천'이란 각자는 인조의 글씨이고, '飛流三百尺 遙落九天來 看是白虹起 飜成萬壑雷'의 오언시는 옆에 주기한 '庚子二月 癸未題' 라하여 1690년 숙종의 시를 새긴 것이다. 이 시를 풀어보면 "흐르는 물은 삼백척 멀리 날으고, 흘러 떨어지는 물은 높은 하늘에서 내리며 이를 보니 흰 무지개가 일고 온 골짜기에 천둥과 번개를 이룬다"는 뜻이다. |
◤⑦ 연경당 | 순조 28년 당시의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창덕궁 안에 지은 유일한 민가형식의 건물로, 사랑채의 당호가 연경당이다. 사랑채엔 안채가 이어져 있고 사방에 행각들이 배치되어 있다. 아흔아홉간 집의 구성이 완비되어 있어 당시 사대부 주택을 잘 보여주며 한국주택사나 생활사 등 여러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섬돌 아래 세벌대 댓돌이 있 | |
| 고, 그 앞에 초헌이나 말을 타고 내릴 때 딛는 노둣돌이 있다. 대청은 4간이며, 툇마루를 놓았다. 동쪽에 2간의 내루(內樓)가 있어 마루방이 되고, 서편에 4간의 방이 사랑방이다. |
◤선향재 | 연경당에 장성한 아들이 살고 있다면 그 아들을 위하여 교육에 소용되는 여러 가지들을 구비하려고 어른들은 노력할 것이다. 서당의 구비도 그 중의 한 요소이다. 수천 권의 책을 쌓아 두고 유능한 스승을 모셔다 열심히 가르치면 영재교육에 손상이 없을 것이다. 선향재는 독서와 서고를 겸한 | |
| 건물이다. 특히 이 건물은 서향이여서 여름철이면 석양의 뙤약볕이 따가우므로, 건물 바깥으로 사랑(斜廊)을 설치하도록 하여 차양하도록 했는데, 유지(油紙) 바른 차양막을 고패에 걸린 끈으로 잡아당겨 개폐하도록 마련하였다. 또 사랑지붕엔 청동판을 인갑(鱗甲)처럼 박아서 비바람에 견디게 하였다. |
◤내의원 | 여기는 본래 내전으로 들어가는 대문이었던 숙장문의 안쪽이며 동시에 편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곳으로 '동궐도'에서는 빈청이라 하였고 『궁궐지』에서는 비궁당이라 하였다. 대신과 비변사 당상관이 국왕을 만나기 위해 모이는 장소이며 때로는 외국의 사신이 임금을 접견하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고 한다. 전의들이 왕과 왕족의 치료를 위하여 머물던 일종의 궁중 의료기관으로, 약방이라고도 부른다. 성정각이 중심되는 건물로, 거기에는 임금 받들기를 지극히 한다는 의미의 '보호성궁' '조화어약' 등의 편액을 높이 달아 두었는데, 정조 어필이다. |
◤⑩ 낙선재, 승화루 |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창덕궁에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건물로 창덕궁의 동남쪽에 서남향을 하고 창경궁과 이웃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승정원 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에 헌종 13년(1847)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된 건물로서 국상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이 거처하기 위 | |
| 하여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순조 28년(1828)에 건립된 연경당보다 20년 뒤에 세워진 곳으로 궁궐에 조영된 주거 건물로 단청칠을 하지 않았으며, 그 구성의 법식과 보존 상태가 훌륭하다. 특히 지형과 환경에 따라 자유분방하며 다양한 건축물을 보여 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여러 가지 특이한 형상의 문살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방한을 고려하여 덧문, 장지문, 갑문의 3중으로 문을 사용하기도 했다. 승화루는 특이한 평면형태를 가진 누각건축으로3간 단랑을 지나 6각루에 둘러싸인 장방형 평면이며, 불규칙한 평면형상으로 자유롭게 연결되어 있다. |
참고문헌: 윤장섭, 2002, 한국의 건축, 서울대학교출판부. |